-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들어가며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칼뱅주의를 계승·발전시킨 대표적인 기독교 지성이다. 칼뱅주의(개혁주의)란 칼빈으로부터 출발하여 꽃피운 17-18세기 영-미 청교도 전통이다. 또한 월터스토프는 네덜란드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사람이다. 네덜란드(화란) 개혁주의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도여베르트 등의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구현하려 했던 신칼뱅주의를 가리키며 개혁주의 전통의 지류이다. 그들은 ‘성경적 진리의 사회-구조적 적용과 구현’에 관심이 많았다. 월터스토프는 신칼뱅주의를 가장 최근에 계승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1장 세계 형성적 기독교 세계 형성적 기독교는 월터스토프가 명명한 것으로 세계의 사회 구조를 개혁하는 기독교를 의미하며, 초기 칼뱅주의 사회사상의 중요한 측면이다. 월터스토프는 칼빈을 포함하여 초기 칼뱅주의 전통에는 ‘급진적 사회 개혁 전통’이 있었다고 말한다. 사회 구조를 하나님이 직접 내려 주신 것으로 설명하는 중세 가톨릭 신학에 대하여 칼뱅주의는 사회 구조가 타락한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것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개혁하는 것은 신자의 권리이자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와 행동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 칼뱅주의 전통의 개혁적 특징은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후기 칼뱅주의 전통에 이르러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2장 근대 세계 체제 저자는 이 책을 시작하는 관점으로 창세기 3장의 인류의 타락 사건을 비추어 이 세상은 타락한 상태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월터스토프는 세계 형성적 기독교의 비전 실행을 위해 먼저 체제 분석으로 시작한다. 자본주의 국가에는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의 구조가 있는데, 중심부는 가장 많은 자본을 축적하고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장악하여 반주변부와 주변부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국경을 넘어 세계화되어 지배 국가들과 피지배 국가들로 구성된 체제 속에 있다. 이것을 저자는 근대세계체제라고 한다.
3장 리마인가 암스테르담인가?: 해방인가 개현인가 세계 형성적 기독교를 가장 훌륭하게 변형시킨 현대의 두 사조인 해방신학과 신칼뱅주의를 논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비참한 빈곤 문제를 중심부에 의한 주변부 착취로 이해하고, 전복적 해방을 위한 실천을 강조한다. 한편 신칼뱅주의는 창조 질서와 문화 명령을 강조하면서, 역사를 신앙 우상숭배의 역학과 분화의 역학의 상호 작용으로 이해한다. 특히 분화에서 ‘영역 주권’과 ‘개현’을 강조하는데, 영역 주권이란 ‘각 영역에 속한 기관들이 다른 영역들에 속한 기관들에 의해 지배받지 않고 갖는 독립적 주권’을 의미하고, 개현이란 ‘각 영역이 다른 영역들의 규범에 대해 열려 있는 개방’을 의미한다. 저자는 해방 신학과 신칼뱅주의가 더 큰 관점으로 융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샬롬’을 제안한다. 샬롬은 하나님과 바르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그 분을 기쁘게 섬기는 상태, 다른 인간들과 바르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인간 공동체를 기뻐하는 상태, 그리고 자연과 바르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물리적 환경을 기뻐하는 상태이다. 또한 샬롬은 정의와 책임과 기쁨을 강조한다. 샬롬 중심적 관점이야말로 신칼뱅주의의 창조 중심적 관점과 해방신학의 구원 중심적 관점을 모두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뛰어넘는다.
4장 부자와 가난한 자: 빈부의 문제 저자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서시는 하나님을 말하며 한 사회에 가난한 자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부자들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 모든 인간은 생존의 권리를 갖고 있고 동료 인간들에게 생계를 보장하는 사회 제도를 만들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와 같이 가난은 자선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인 것이다. 저자는 종교가 빈곤을 영속화했다는 견해를 반박하며 제3세계가 가난하게 된 원인을 그 지역 안의 내적 요인에서만 찾고 있으며, 사회적·경제적 구조 개혁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5장 민족과 민족의 투쟁: 민족주의의 문제 저자는 근대세계는 민족에 대한 충성심에 근거해서 행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역학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민족주의란 한 민족이 스스로의 민족의식에 사로잡힌 이데올로기이다. 한 민족이 부당한 피해를 당했다고 확신할 때 민족주의는 촉발된다. 또한 한 민족이 자기 존재에 너무 몰입하게 되면, 자기 민족의 영광을 최고의 선으로 떠받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민족에 대한 충성 자체가 목적이 되는 우상 숭배적 민족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저자는 정의와 샬롬을 강조하며, 국가란 모든 시민들의 국가가 되어야지 그 시민 가운데 일부 민족의 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교회는 민족에 상관 없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가 교회 속으로 파고들어왔다고 현실을 개탄한다.
6장은 기쁨의 도시: 샬롬과 도시의 미학 세계 인류의 다수가 살고 있는 추한 도시를 아름답게 바꿀 것을 역설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정해주신 운명은 자연에 둘러싸인 인간 공동체의 삶으로서 바로 샬롬을 말한다. 아름답고 기쁨의 도시들인 중세의 도시들과 달리, 현대의 도시들이 추해진 데는 경제 성장과 이윤 획득을 중시하는 것과 사생활 중심주의가 있다. 여기에는 예술적이지 않다는 의미가 뿐이 아니라, 참된 인간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인간을 기계로 전락시키는 구조와 미학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도시가 참으로 인간답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가 반영된 공간이 되지 못하는 것은 지베엘리트들의 과욕과 그들의 이해관계에 걸맞는 도시디자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7장은 정의와 예배: 개신교 예배 의식의 비극 예배하는 인간은 인간의 본질이다. 우리의 예배는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를 불신자의 사회 참여와 구분지어주는 핵심적 표지라는 것이다. 안식과 예배의 날을 노동의 중간중간 삽입해 놓으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드리는 자연 만물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순종하는 행위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와 사회 개혁이 진정으로 기독교적이 되기 위해서는 예배의 회복이 필요하게 된다. 기독교인에게 예배는 노동과 사회 개혁의 참된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핵심적 수단이자 표지인 것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선포 행위와 예배 행위가 번갈아 이루어지며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개신교 예배 의식의 비극은 기독교인이 과거사건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예배를 억누르고 선포에 지나친 강조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심각하고 냉정하며 기쁨이 없는 예배가 되어 버렸다.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특히 성만찬을 예배 의식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복귀시켜야 한다.
8장 이론과 실천: 실천 지향적 학문 사회적 신념과 이론화 작업이 통합되어야 하며 기독교적 신념이 이론화 작업의 지배적 관심이 되어야 하는데 저자는 정의를 위한 투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론화 작업을 요청하면서 실천지향적 이론을 강조한다.
-나가며
사회경제학과 신학이 어우러진 이 책은 의학을 전공한 나에게 커다란 짐이 되는 책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후 세상을 바라보는 지경이 넓어진 것을 느낀다. 물론 저자의 사상이 온전히 주님의 뜻을 반영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칼뱅주의자들의 사회 비판의 시작과 사회개혁 사상은 성경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세상을 성경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한다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참 자세가 아닌가 싶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이 땅에 하나님의 샬롬이 임하는 상태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한 샬롬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짐으로 가능하다. 물론 완전한 샬롬은 주님의 재림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이 세상에 구현해 나가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빈곤의 문제를 인구의 문제와 연결시키면서 인구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인구문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세월이 지난 요즘에 판단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만일 나의 사상적 학문적 가치관이 기독교적 신념과 부딪힐 때는 주님의 진리 쪽에 서야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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