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토트
예수님의 공중 사역의 균형 잡힌 모습으로 예수님의 삶 속에서는 복음 전파와 섬김의 행동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예수님의 모범 예수님께 말과 행동은 하나였으며 그의 행동은 그가 선포하고 묘사한 천국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눈, 마음 그리고 손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행동들을 단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사탄의 지배가 몰락하는 증거로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동정에서 우러나온 평범한 행동으로 동정은 예수님의 섬김 이면에 있는 최고의 동기였다. 그는 인간적 필요를 보시고 깊이 감동하셨으며, 동정하셨으며, 그래서 행동하셨다. 거의 모든 경우에서 예수님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육체적 조건이었다. 예수님의 동정을 불러일으킨 것은 도움이 필요한 개인들 뿐만 아니라 무리들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보셨으며, 느끼셨으며, 행동하셨다. 행동은 눈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손으로 이어진다. 예수님의 동정은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촉발되었고, 그것은 언제나 적절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감상이 아닌 섬김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희생적인 행동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려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버린다"고 말할 수 있다. 주는 것도 없고 섬기는 것도 없는 곳에는 우리가 아무리 크게 나팔을 불어도 결코 사랑이란 없다. 핵심은 그가 자신이 가진 것과 본 것을 연결할 것인지, 아니면 둘을 명확히 구분할 것인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본 것에 우리가 가진 것을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궁핍한 형제를 도와줄 마음을 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정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본 것과 가진 것을 연관시키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분별하는 사랑 주는 것과 섬기는 것을 제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사랑이다. 우리는 무차별한 사랑이라는 함정에 빠지기도 쉬운데, 참된 사랑은 분별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 자신이 본을 보이시고 또한 가르치신(특히 산상수훈에서) 것들을 살펴볼 차례다. 그분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눅 6:27)고 말씀하셨다.
순수한 선행 예수님이 본을 보이셨고 또 명령하셨던 선행의 개념을 회복하려면, 우리는 선심을 베푸는 척하는 태도와 자기 의, 그리고 ''참여 없는 피상적인 헌신'을 극복해야만 할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은 사랑의 순수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진실로 우리는 사랑이라는 어휘가 타락한 사회에서, 사랑은 감상적이거나 이기적인 감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사람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바리새인들의 유희이지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정령주의자,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또는 불교도)을 돕는 것을 꺼리지는 않는가? 혹은 우리가 베푸는 도움이 복음에 마음을 열게 하는 수단이 아닐 경우에는 그들을 섬기길 꺼리지는 않는가? 물론 우리는 그들과 복음을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선행의 동기가 순수한 관심이 아니라면, 우리의 수고는 무가치하게 되고 심지어 하나님을 욕되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물질적 축복과 영적 부요함 둘 다를 나누도록 격려한다.
무엇을 줄 것인가 우리 이웃은 사회 속에 있는 영적, 육체적 존재다. 우리 이웃의 영혼이나 육체나 사회성 중 한 측면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대위임령("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이 모든 다른 명령에 우선하며 더 나아가 다른 모든 명령을 대신한다고 까지 생각하는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것이 둘째 가는 큰 계명(우리의 전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 다음으로 중요한)이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에 의해 성취된 위대한 구원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우리 할 바를 충분히 다 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심판에 대한 경고 예수님의 가르침 중 또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심판에 대한 경고다. 예수님은 선행을 그분의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셨는데, 이 기준이야말로 그분의 모범과 가르침의 중요성을 날카롭게 인식하게 한다. 우리의 칭의가 행함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이루어진다면 모순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들의 칭의는 진실로 믿음으로써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경의 신약 기자들은 우리의 믿음이 진실하고, 살아 있으며, 구원받은 믿음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선한 행동으로 표출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의 신앙을 확고하게 보여 주는 유일한 증거는 사랑에서 나온 선행이다. 비록 우리의 칭의는 믿음만으로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심판은 행위, 즉 선행에 근거하리라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우리가 참된 예수님을 따르고 그의 발자취를 좇으려 한다면, 선행을 할 만한 모든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선행은 우리 사랑이 진실됨을 보여 줄 것이며 그 사랑은 우리 믿음이 진실됨을 보여 줄 것이다.
♡ 느낀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김의 행함으로 나타내야 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척도가 되며 심판날에 주님의 잣대가 될 것이라는 내용을 접하고 내 마음 속에 새로운 도전이 생긴다. 과연 나의 믿음은 얼마나 행함으로 나타났는지를 돌이켜 본다. 나는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하면서, 믿음이 크다 하면서 얼마나 이웃을 섬기는 행위로 결실을 맺었는지 주님 앞에서 회개하게 된다. 세상을 살면서 이웃의 아픔과 궁핍함과 고통을 눈으로 보면 감상적인 사랑이 아닌 섬김으로 나타나는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행하여야 함을 느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도록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내가 할 수 있는 섬김을 내 의지를 다하여 행하여야 겠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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