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얀시
저자는 방황하며 교회를 떠나곤 했는데 그 때마다 고통받고 사랑이 식어감을 느끼며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던 중 교회 안의 위선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라 결론짓게 되고 그러면서 마음의 여유와 너그러움이 생겨나고 남들을 용서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으며 교회 또한 예외가 아닌데 교회를 어떻게 버릴 수 있는가란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생각들이 요즘 여러 교회가 겪고 있는 아픔들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답해주고 있는 것 같다. 문제의 대상이 성도이건 교역자이건 간에 모두 불완전하고 부족한 인간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고,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 교회라면 주님의 재림 후에나 가능한 것이며, 모든 문제 앞에서 상황 너머에 계시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굳건히 해야 함을 느꼈다. 또한 기독교는 결코 지적이고 내적이기만 한 신앙이 아니라 삶이 수반되는 종교이며 그 삶은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바른 시각을 통해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로 교회관이 정립되면 교회에 참여하며 그곳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곳이 되도록 힘을 보탤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예배의 관객이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배를 마치고 떠날 때 내가 무엇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셨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주된 이유이며 하나님의 관심은 마음의 제사에, 내면의 태도인 복종과 감사에 있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울려드릴 수 있는 최상품의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함을 느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내 자신의 모든 것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기독교 공동체의 기초는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것은 국적, 인종, 계급, 나이, 성별의 모든 차이를 뛰어넘는다. 그 공동체 안에서의 연합은 결코 획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다양성은 결코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이러한 다양성은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으로 인해 같은 목표와 신념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 유기체처럼 살아 숨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자는 사회봉사야말로 교회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며 사랑을 베푸는 사람일수록 더 풍요로워지는게 신앙의 역설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교회에 가면 안을 들여다보면서 내 안에 있는 경쟁과 비판의 독을 제거하고 대신 은혜로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받아서 실천해야 할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교회가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표지가 되고 세상과 충돌하지만 가능성으로 충만한 길임을 저자는 고백하고 있다. 저자는 겸손, 절대 정직, 절대 의존의 특성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뜻하셨던 바이며 교회 안에서 나에게 필요한 건 다른 죄인이라고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접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교회란 이미 거룩해진 성도들의 모임이 아니라 거룩해지려고 하는 무죄 판결을 받은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 보게 되는 다른 성도의 허물을 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며 그 허물을 주님의 사랑으로 덮고 품어야 함을 느꼈다. 또한 교회를 세우신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려고 자기 몸을 찢으셨기 때문에 교회는 우리가 고통을 가져갈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는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만큼 크고도 작은 것이다. 인간의 제도 중에서 유일하게 선택권이 없는 것이 가족이다. 교회는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이상하고 별난 사람들과 자발적으로 하나가 되라는 것이며 인간의 다른 어떤 기관보다 가족을 더 닮았다. 또한 교회는 승리 팀의 선수 탈의실처럼 기뻐 환호하는 곳 감사하는 곳이다. 모두가 용서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축하하는 곳이다. 교회와 각 지체들은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양극의 힘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된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를 통해 나타나며,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함께 대변하고 세상에 하나님을 구현해 보이도록 부름 받았다. 세상의 눈 앞에서 우리 자신은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다. 사역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피부로서 각종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인간의 영혼을 고치려면 몸을 고칠 때보다 더 민감해야 하기에 사역하는 사람에게는 외과의사의 정교한 기술이 필요할 때도 있다. 반면 짐이 너무 무겁고, 자원이 달리고, 대책 없는 문제들에 에워싸여 있을 때면 굳은살이 필요할 수도 있다. 사역에서 과민성이란 누군가의 고통을 느낀다는 뜻이다. 타인의 눈물을 먹는다는 뜻이다. 때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의미는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그 고통이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다는 확신이다. 예수님은 사역하는 자들 본인이 받는 영향에도 똑같이 관심을 두신 것 같다. 눈물을 먹으면, 눈물을 흘리는 본인 못지않게 그 눈물을 자발적으로 떠맡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 강해지는 길은 약함을 통해 나 있다.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사역의 모본이다. 그 기회를 통해 긍휼과 겸손, 인내 같은 자질을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가장 자주 반복하신 선언은 우리가 목숨을 잃음으로써 얻는다는 것이고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저자는 사역과정 중에 생길 수 있는 탈진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눈문을 너무 많이 먹으면 소금 독이 오른다. 탈진의 조기 경고 증상은 무모한 책임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려면 오히려 초연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건강하지 못한 자기 희생, 사람 자신보다 사람의 고통을 더 떠맡는 증상을 구세주 콤플렉스라고 한다. 하나님만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는 자유로이 섬길 수 있다. 하나님은 겸손과 감사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일하신다. 하나님은 삶이 아니다. 삶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간다면 물리적 현실이 무너질 때도 견딜 수 있다. 삶의 모든 부당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사이의 아슬아슬한 길에서 균형을 이루도록 도우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저자는 비록 작곡자가 품었던 뜻은 끝내 우리가 이루어 낼 수 없을지라도 이 땅에 그 소리가 들리려면 그 길 밖에 없다고 글을 맺고 있다. 내가 가정과 교회 직장에서 주님의 일을 하며 섬길 때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며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교만을 버리고 모든 것은 주님이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기쁨 가운데 행하면 반드시 승리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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